제목 | 대전 인천 부산 수원 대구 성지 시세표 아이폰16 가격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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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Fleta |
작성일 | 25-03-08 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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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용수성지-김대건 인천성지,수원성지 안드레아 신부 표착지- 제주특별자치도 한경면 용수리 4266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발자취를 찾아 오랜 세월 성지 순례를 한 것 같다. 오늘 제주도 용수성지를 순례하고 가만 생각해 보니 솔뫼, 해미, 골배마실, 은이, 마카오, 나바위, 서소문밖, 백령도, 새남터, 왜고개, 미리내, 대신학교, 여의도 시복시성터를 순례하였다. 이제 남은 곳은 필리핀 롤롬보이와 통일이되면 황해도 순위도를 순례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롤롬보이는 어찌어찌 가능하겠만 순위도는 기약하기 어려운 일일 듯하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 년표]1784년 경 : 이존창 루도비꼬의 권유로 조부 김택현, 증조 김진후 천주교 입교 (서울 중구 을지로 66 서울 김범우의 집)1805. : 증조 김진후 체포1815. : 증조 김진후 해미성지에서 옥사(10년간 옥고) (충남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해미성지)1821. 8.2 1 : 출생(충남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 솔뫼성지) 보명 : 지식(芝植), 부-김제준 이냐시오, 모-고 우르슬라1827. : 서울 용산 청파동 및 경기 용인 처인구 이동읍 묵리로 이주1828. : 박해를 피해 경기 용인시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810 골배마실)1836. : 세례명 안드레아로 영세(은이공소,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1836.12. 2 : 신학생 선발 및 출발(김대건, 최양업, 최방제)1837. 6. 7 : 마카오 도착, 사제수업1839. 5. 3 : 영국의 아편수출에 따른 민중항쟁으로 필리핀 마닐라 롤롬보이 성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에서 수학1839. 9.26 :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 순교(서울 중구 칠패로 5 서소문밖성지)1844.12.15 : 부제 서품(페레올 주교)1845. 1. : ‘라파엘호’로 잠시 밀입국1845. 4.30 : 천주교 신자 12명과 함께 제물포항(인천항)을 떠나 상하이로 감1845. 8.17 : 사제 수품[페레올 주교, 중국 상하이 진쟈상(김가항) 성당] 8.24 : 상하이 완담(횡당)성당(예수회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1845. 8.31 :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와 함께 ‘라파엘호’로 상하이 출항1845. 9.28 : 태풍으로 제주표착(제주도 한경면 용수1길 108 용수성지)1845.10.12 : ‘라파엘호’ 수리 후 금강 하류 나바위 도착 (전북 익산시 망성면 나바위1길 146 나바위성지)1846. 6. 5 : 선교사 입국로 개척하다가 서해 ‘순위도’에서 체포1846. 9.16 : 병오박해 참수 치명(25세, 서울 용산구 이촌로 80-8 새남터성지)1946. 9. : 이민식 빈첸시오(16세) 가매장(서울 용산구 한강대로40길 46, 왜고개성지)1946. : 시신 안장(경기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 미리내성지)1857. : 가경자 선포(비오 9세)1925. 7. 5 : 시복(교황 비오 11세)1960. 7. 5 : 김대건 신부 시신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성당에 이장1984. 5. 6 : 시성(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2 시복시성터)2001. : 상하이 지방법원 부속건물 건축으로 진쟈상(김가항)성당 철거(은이성지에 복원, )2021. :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2023. 9.16 :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외벽 벽감에 성상 설치(아시아 성인 최초)[용수포구에서 보는 차귀도(우)][용수성지][용수성지][용수성지][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상][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상][십자가의 길 제12처 예수님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성 김대건(안드레아)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최초의 한국인 사제이며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는 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는 죽을 위험에서 구해주신 하느님의 섭리와 성모님의 인천성지,수원성지 도우심에 감사하면서 고국 땅에서 감격의 첫 미사를 올렸다.천주교 제주교구는 김대건 신부의 제주표착을 뜻깊게 생각하여 여기에 기념성당과 기념관을 세웠다. 성당의 정면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김가항 성당 정면 모습이며, 지붕은 파도와 라파엘호를 형상화한 것이다. 등대모양의 종탑은 어둠에 빛을 비추는 교회와 김대건 신부의 상징이다.이 성당은 천주교 제주교구와 전국의 여러 성당 신자들의 정성으로 지어져 하느님께 봉헌되었다.2008년 9월 20일천주교 제주교구[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 뤼드박의 성모]■ 뤼드박 성모상 1830년 프랑스 뤼드박에 발현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 기적의 패,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에 사용하는 성모상으로 은혜의 성모상·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으로도 부른다.특징은 양팔을 펼친 모습으로 머리에 흰 수건을, 어깨에는 푸른 망토를 두르고 발아래에는 지구를 감싸고 있는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이다.[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감실]【성 김대건 신부 유해 / 성 모방 신부 유해】[십자가의 길 제12처, 제11처][십자가의 길 제12처][십자가의 길 제11처][성 김대건(아드레아)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프란치스코 교황][고백실][유아실][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은혜의 성모상][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관][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관][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관][형구][사형모=용수, 몽두][형구][자비의 예수, 영원한 도움의 성모][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한국103위 성인화][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제5대교구장 성 다블뤼 신부][성 현석문 가를로][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상해 김가항 성당][성 김대건 신부 첫 미사 봉헌성당인 상해 황당성당][성 김대건 신부 상]【선대로부터 이어온 신앙심과 순교정신】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는 충청도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시골에서 낮은 관직을 얻었던 그는 두 차례의 체포와 석방을 겪었고,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1814년에 충청도 해미에서 옥사 순교하였으며, 1816년에는 종조부인 김종한(안드레아)마저 대구에서 참수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부친 김제준(이냐시오)은 이후에도 얼마동안 고향인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거주하였으나, 다시 박해의 위험이 닥치게 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을 거쳐 경기도 용인의 산중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용인의 골배마실(현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남곡리)과 이웃의 한덕골 (용인시 이동면 묵리의 굴암)은 일찍부터 비밀 신앙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형성된 마을이었으므로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고 있었다. 동생인 난식(프란치스코)과 함께 집안의 신앙과 순교 전통을 먹고 자란 김대건 소년은 점차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하느님의 종으로 성장하였고, 이때부터 순교의 영광에 대한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아가기 시작하였다.【성 김대건 신부 떡뼈(복제)】【김대건 신부의 친필서한】김대건 신부는 21통의 서한과 1통의 순교 보고서, 2통의 작문, 1편의 조선전도 등 25건의 문서를 남겼다. 이 밖에도 3통의 서한이 있었다고 하나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현존하는 21통의 서한 중 마지막의 한글 서한은 「조선 교우들 보아라」라는 ‘회유문’이고, 한문 서한(1844년 12월)과 라틴어 서한(1846년 8월 26일자의 옥중 서한)은 현재 프랑스어 번역본만 남아 있다.‘회유문’ ;은 조선 교우들에게 교리를 충실히 따르도록 부탁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고자 한 것으로, 이를 통해 조선 교우들에 대한 김대건 신부의 지극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조선전도】이 지도는 성 김대건 신부가 1845년 8월,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제주도를 거쳐 전라도 나바위에 상륙한 후 1846년 9월 순교하기 전까지 외국인 선교사들의 해상 입국로 개척을 위해 제작한 것이다.이 지도에서 보면, 서해안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섬들이 구체적으로 표시되어 있고, 특히 제주도 서쪽 끝 차귀도의 위치가 정확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원본은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인천성지,수원성지 있다.)【김대건 신부 유해 보존 현황】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처음 안장된 이래, 여러 곳으로 옮겨서 안치되고 있다.1846. 10. 26. 새남터 순교지에서 와서 서울 용산의 왜고개로 이장되었던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서 야고보, 박 바오로, 이민식(빈첸시오)등에 의해 미리내(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안장됨▪1846.10.26. 새남터 순교지에서 와서 서울 용산의 왜고개로 이장되었던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서 야고보, 박 바오로, 이민식(빈첸시오)등에 의해 미리내(현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안장됨▪1901. 5. 21.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이장▪ 10. 17. 신학교 성당 안치▪1950. 9. 28. 경남 밀양 성당 안치▪1960. 7. 5. 혜화동 대신학교 안치(유해 중 하악골은 미리내 경당에, 치아는 절두산 순교기념관으로 분리 안치)【25세의 나이에 천상영광의 길로…】1846년 6월,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동료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 통로를 알아보기 위해 백령도 부근을 돌아보던 김대건 신부는 순위도 등산진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김대건 신부는 조정 대신들의 요구에 의해 옥중에서 영국의 세계지도를 번역하여 컬러로 두 장의 세계지도를 만들었으며, 지리 개설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서양 문물에 대한 지식과 재능은 임금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따라서 온갖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이에 굽히지 않자 40여 차례의 심한 문초와 형벌 끝에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김대건은 25세의 나이로 참수되어 천상 영광을 안았다. 이때 마지막 남긴 말은 이러하다.“나는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합니다. 죽은 다음에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 여러분도 천주교를 믿으십시오.”【조선 최초의 사제, 김대건】1845년 상해에서 한국인 최초의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는 서울에서 잠시 사목한 뒤, 모친이 거주하던 용인으로 내려가 그 일대의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모든 활동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는 박해자들과 배교자, 밀고자들의 눈길을 피하며 비밀리에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교우촌에 방문하여도 오래 머무를 수 없었고, 미사를 드릴 시간도 없었다. 밤중에 교우촌을 찾아다녀야 하고 교우촌에 당도하면 복사를 시켜 교우들을 모은 다음, 벽에 고상을 걸고 성사를 준 뒤 곧바로 다른 교우촌으로 가야했다. 교우들은 신부님을 전송할 수도 없었고 집안에서 무사하기만을 빌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성사를 받은 교우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김 신부 또한 하느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순방을 계속하였다.【성 김대건 신부의 주요 활동 연표】【라파엘호의 고증기록】페레올 주교가 파리의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5년 10월 29일자 서한에 따라 배의 구조를 살펴보면, 길이 25자, 너비 9자, 깊이 7자의 크기에 아주 높은 돛대 두 개 가마니로 이은 돛 두 폭이 달려 있고, 쇠못을 하나도 쓰지 않은 채 널판은 나무못으로 서로 이었으며 타마유나 틈막기도 전혀 없었다. 뱃머리는 선창까지 열려 있는데 이것이 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권양기 끝에 나무로 된 닻이 하나 있었다. 아울러 라파엘호 갑판의 일부분이 자리가마니로 덮여 있고, 일부분은 아무런 고정기구로 고정되지 않은 채 그저 잇대어 깔아 놓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으며, 갑판 위에는 배 안으로 들어가는 구멍이 3개 있고, 하늘이 흐리면 닻을 내리고 배에 짚으로 된 덮개를 덮을 수 있도록 하였다라파엘호는 김대건 신부가 1845년 4월 30일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갈 때 타고 갔다가 8월 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11명의 교우 등과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입국할 때 타고 왔던 배의 이름이다. 조선의 일반목선을 타고 인천성지,수원성지 상해를 떠나면서, ‘토비아의 길을 인도하였다’는 여행자들의 주보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배의 이름을 지었다.1845년 1월부터 4월까지 서울 돌우물골에 거처하였던 김대건 부제는 이 땅에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교우들과 함께 배를 구입하여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가게 되었다. 김대건 부제 일행은 출항 하루만에 큰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으나, 깊은 신심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5월 28일 마침내 중국의 오송항에 도착하였다. 그런 다음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에게 8월 17일 사제품을 받은 후, 8월 31일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라파엘호는 풍랑에 표류하게 되어, 상해를 떠난 지 28일 만인 9월 28일에 제주도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다. 배를 정비한 일행은 다시 북상하여 10월 12일에 충청도 강경 부근의 황산포나바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호와 생사를 함께한 기간은 5개월 12일이나 되었다.김대건 신부 일행의 제주표착지와 라파엘호에 대한 조사연구는 1998년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시작된 것이다. 이 조사·연구 결과 김대건 신부 일행이 표류하다가 처음 발견한 곳은 제주 서단의 죽도, 즉 차귀도였으며, 라파엘호가 정박한 곳은 용수리 포구였고, 따라서 이곳 일대는 김대건 신부 일행이 표착하여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한 한국천주교회의 중요한 사적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제주교구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제주도 표착지에 관한 연구논문과 라파엘호 고증 복원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간하고 100주년위원회에서는 1999년 5월 22일,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지 선정 및 라파엘호 고증 복원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서울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강당), 성산포 오조리 간이 조선소에 의뢰하여 라파엘호를 복원하였다. 그리고 성 김대건 신부의 조선 귀국로를 따라가면서 그분의 숭고한 삶을 체험하고 이를 통해 신앙 후손으로서의 신앙 쇄신을 위해 노력한다는 목적 아래 ‘라파엘호 상해~제주 해상 성지 순례’를 계획하였다. 이 순례는 1999년 9월 8일 제주대학교 실습선인 아라호에 복원된 라파엘호를 싣고 제주항을 떠나 중국 상해로 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순례단은 9월 14일까지 상해 순례를 마치고 귀국하여 제주항에 라파엘호를 하역한 뒤, 9월 19일 오전까지 라파엘호를 이용한 선상체험과 표류 체험(장소 : 제주 비양도 근해)을 실시하였다.[신분을 감추기 위해 입었던 상복][한국에서의 첫 미사봉헌 모형도][뭇세 신부의 통행증]【제주에 뿌린 산앙의 씨앗】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 정난주(丁蘭珠, 마리아, 1773~1838)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된 황사영의 부인이다. 그녀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정씨 집안에서 정약현(정약종과 정약용의 큰형)의 장녀로 태어났다. 정난주는 18세가 되던 1790년 무렵에 황사영(알렉시오)과 혼인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어야 했다.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에 은거하면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할 장문의 보고 서한인 「백서」를 작성하였다. 1801년 9월 29일 황사영이 배론에서 체포되고 「백서」가 압수되면서 조정에서는 이를 대역부도(大逆不道)죄 로 다루어 그에게 능지처사(陵遲處死)의 판결을 내렸다. 이어서 부인 정난주와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죄가 적용되어 모두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정난주는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로, 아들 경한은 추자도의 관노로 가게 되었다.그녀는 37년 동안 관비(官婢)로 제주도 대정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그녀를 양모처럼 봉양하던 김상집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한굴왓에 안장하였다. 제주의 천주교 신자들은 정난주 마리아를 ‘신앙의 증인’으로 섬기고 있다.[황사영 백서]【제주에 뿌린 신앙의 씨앗】순교복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자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 1816~1867)은 제주목 함덕리의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57년 초 동료들과 무역 차 배를 타고 서귀진에서 인천성지,수원성지 모슬포로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중국 광동 해역에서 홀로 구조되어 홍콩의 파리외방선교회 극동대표부에 인계되었다.그는 이곳에서 조선신학생 이만돌(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뒤 1857년 5월 31일 제주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이후 김기량은 제주와 육지를 오가면서 최양업 신부와 페롱 신부 등에게서 성사를 받았으며, 친지와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세례준비가 된 예비신자들을 세례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들 중 김기량과 고씨는 선교회의 입회를 원할 정도로 열렬한 신자로 성장하였다. 이에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김기량에게 선교사 1명을 제주에 파견해 주겠다는 약속도 하게 된다.하지만 1866년 병인박해 때 무역하러 여기저기 다니다가 경상도 통영에서 체포되어 당시 교우 4명과 함께 통영 관아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다음 해 1월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김기량이 다시 살아날 것이 두려워 포졸들이 그 시신에 대못을 박기도 하였다.【제주도에 표착했던 주교님과 성인들】페레올 주교18.12.27.프랑스에서 태어남1839. 9.21.제3대 조선대목구(교구)장1845. 8.17김가항 성당에서 김대건 사제서품 집전1845.10.12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에서 제주도를 거쳐 입국1853. 2. 3.과로와 건강악화로 병사(45세) 다블뤼 신부1818-1866 1818. 3.16.프랑스에서 태어남1841.12.18.사제수품1845.10.12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에서 제주도를 거쳐 입국1866. 2.23.제5대 조선교구장1866. 3,30.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48세) 김대건안드레아신부1821-1846 1821. 8.21.충청남도 솔뫼에서 태어남1844. 12중국 소가자에서 부제수품1845. 8.17.중국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수품1845.10.12.상해항 출발 제주도를 거쳐 황산포로 입국1846. 9.16.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25세) 현석문가를로1797-1846 1797서울에서 태어남1845. 8.17.김대건 부제의 사제수품식에 참석1845.10.12.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에서 제주도를 거쳐 입국기해박해 순교자들 전기(기해일기)제작1846. 9.19.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49세) 최형 베드로1814-1866 1814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남1845. 8.17.김대건 부제의 사제수품식에 참석1845. 10.12.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에서 제주도를 거쳐 입국주교의 명에 의해 성교일과 등 교회서적 간행1866. 1.23.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52세) [성 김대건 신부의 고난의 길 14처][제주 천주교회사]【파리 외방선교회의 제주도 선교와 본당 설립】1886년 한불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자유롭게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전교 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한불조약체결 뒤에도 얼마 동안 교회사에서 벗어나 있었다.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의 순교 이후 신앙의 빛을 잃어버렸던 제주도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때는 1898년이었다. 제주 출신 양용항(베드로)과 이(라우렌시오)가 육지를 왕래하던 중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한 뒤 고향에 돌아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이다.곧이어 1899년 성직자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정식 본당의 설립이 추진되었다. 1899년 4월 22일 뮈텔 주교가 페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를 제주로 파견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페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는 5월 26일 제주에 들어왔고, 5월 28일에는 첫 미사를 드리게 되었다. 두 선교사는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할 집을 매입하여 6월 14일 입주하게 됨으로써 제주도에 본격적인 선교시대가 열렸다.【신축교안】구한말 대한제국은 황실 재정을 충당하기 위하여 1900년 봉세관 강봉헌을 제주도에 내려 보냈다. 그는 공유지에 대한 과도한 징세뿐 아니라, 심지어 어장·그물·소나무·목초지에 대해서도 무리한 징세를 하여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1899년 두 명의 선교사가 파견됨으로써 전교하기 시작한 제주의 천주교회는 교세를 급속히 키워갔다. 이 과정에서 축첩반대, 무속신앙 배척, 마을의 신목과 신당을 파괴하는 일들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자주 주민들과 충돌하였다.1901년 2월 정의군 하효리의 오신락(吳信洛) 노인이 교당에 잡혀가 죽는 사건이 생기면서 교회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세금의 폐단과 교회의 폐단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정군에서는 상무사 가 조직되어 교민들과 사사로운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결국 1901년 5월 초 중앙의 조세 수탈에 저항한 민회가 열리고 민란이 시작되었다. 봉세관의 인천성지,수원성지 조세 수탈을 시정하기 위하여 일어난 민란은 5월 10일 강봉헌이 육지로 피신해버린 데다, 5월 14일 교회측의 한림민회소 습격에 이은 대정성 진입 발포사건을 계기로 민군과 교회측의 대결로 치달았다.이 민란의 과정에서 관덕정 등지에서 피살된 사람들은 대부분 교인들이었다. 당시 제주에 파견된 평리원 안종덕(安鍾德) 검사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숫자는 교민 309명, 평민 8명이었다.1901년 10월 민군지도자 세 명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피살된 교인들 중 연고가 없는 이들의 시신은 천주교 공동묘지가 된 황사평에 안장되어 있다.【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제주 선교활동】1934년부터 제주지역은 아일랜드에서 창설된 성골롬반회 선교사들이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대구 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1934년 4월 1일자로 성골롬반회의 손 파트리치오도슨 신부와 서 아우구스티노스위니 신부를 제주본당 보좌로 나 토마스라이언 신부를 홍로본당 보좌로 임명하였다. 1937년 8월 15일 홍로본당 나 토마스 신부가 본당을 서귀포로 이전함으로써 ‘서귀포본당’이 시작되었다.세 신부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 하에서 신자들과 고난을 같이 겪으며 독립의식을 심는 데에도 힘을 썼다. 일제는 1941년 10월 천주교회를 의도적으로 탄압하여 3명의 신부와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구금하였다.1945년 해방과 더불어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신부와 신자들이 석방되었고, 본당으로 다시 부임하여 4·3과 6.25의 혼란 속에서 신자들을 잘 보호하였다. 1955년 현 하롤드(헨리) 교구장, 원요한(세비지) 신부, 임파트리치오(맥그린치) 신부 등 골롬반회 사제들의 노력으로 제주도에 처음으로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되었다. 한편 한림본당의 임 파트리치오 신부는 1957년부터 농촌부흥운동을 전개하여 성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를 중심으로 제주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1971년 6월 제주감목대리구를 ‘제주지목구’로 설정하는 동시에 광주대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가 지목구장에 임명됨으로써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제주교회 발전의 커다란 디딤돌을 놓게 되었다.【성이시돌 목장의 탄생과 변천】1957. 3. | 임피제 파트리치오. McGinchey 4H 클럽 조직1957. 3. | 가축은행개설1959. 3. | 직조 강습소 개설1961.11. | 성이시돌 중앙실습목장 탄생1962.10. | 재단법인 성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를 설립1964. 4. | 성이시돌 배합사료공장 가동과 제주 양축농가의 증가1967. | 어승생 수원지에서 목장까지(18.2km) 수도관을 묻어 식수와 가축용 수원을 확보1970. 4. | 성이시돌의원 한림에서 개원 극빈환자 무료진료시작1981.11. | 무의탁자 14명 입주를 시작으로 성이시돌 목장 구내에 양로원1991.10. | 삼뫼소 은총의 동산(현, 새미 은총의 동산) 개원2001.10. | 삼위일체성당 건립【초대 주교】현 하롤드 H. W. Henry 대주교, 초대주교(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1909. 7 11. |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출생1932.12.21. |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사제로 수품1933.10. | 한국 입국 후 본당 사목1941. | 일제 치하에서 옥고를 치름1950. 8. | 한국 재입국 후 광주교구장 서리로 활동1953. 5.31. | 레지오 마리애 한국에 도입1954.10. | 광주교구장 임명1957. 5.11. | 주교 수품(미국 보스턴)1962. 4.24. | 대주교 승품1971. 7.24. | 제주 1대 주교 임명1976. 3. 1. | 제주에서 선종【2대 주교】박정일 朴正一, 미카엘 주교(충성과 온유) 1926.12.18. |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출생1948~1951. | 덕원신학교와 서울 성신대학에서 수학1952. 7. | 로마 유학1958.11.23. | 사제 서품1959 ~ 1962. | 철학·신학·사회학 석사학위 취득1962-1970. | 본당 사목1970-1977. | 광주 대건신학대학 교수1977. 4.15. | 제주 2대 주교임명1982. 6.24. | 전주교구장 임명1988.12.28. | 마산교구장 임명【3대 주교】김창렬, 바오로 주교(믿음과 은총으로) 1927. 1.25. | 황해도 연백 출생1945. | 가톨릭대학 입학1953. 8.22. | 사제 수품1953~1956. | 육군 군종1960.~1962. | 로마 라테라노 대학원 윤리신학1962.~1963. | 미국 뉴욕대학 신문학1964.~1973. | 가톨릭대학(대신학교) 교수1965.~1967. | 가톨릭 중앙의료원장 겸 가톨릭 의대 인천성지,수원성지 학장1969.~1973. | 가톨릭 대학교 총장1973. 1983. | 가톨릭중앙의료원장1983.11.11. | 제주교구장 임명1984. 1. 6. |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주교 수품1984. 1.26. | 제주교구장 착좌1984.~1987. | 주교회의 교리 위원회 위원장1987.~1996. | 주교회의 문화위원회 위원장2002. 7.15. | 제주교구장 사임【선종사제】김병준(金丙準) 요한 신부▪서품일 : 1952년 2월 12일▪사목지 및 재임기간 :1952~1953. | 제주중앙본당 보좌1953~1973. | 신창·서귀포·모슬포본당 주임1973~1991. | 신성여자고등학교 교장1991~1995. | 동문본당 주임▪선종일 : 2001년 9월 10일 임승필(任承弼) 요셉 신부▪서품일 : 1979년 6월 2일▪사목지 및 재임기간:1979~1988. | 오스트리아·로마 유학1987.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 박사학위 취득1988~1989. | 제주중앙본당 보좌1989~1991.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서위원회2002. |신·구약 성경, 한국 천주교 최초로 우리말 번역 완료▪선종일 : 2003년 3월 24일【선종사제】나 토마스 T. D. Ryan 신부▪사목지 및 재임기간:1934~1952. | 서귀포본당 보좌 및 주임1952~1955. | 신성여자중고등학교 이사장 대리▪선종일 : 1971년 11월 20일 원요한 J. G. Savage 신부▪사목지 및 재임기간 :1952~1994. | 서귀포 제주중앙·광양·서문·동문 중문본당 주임1962~1966. | 1969-1970. | 광주대교구 부주교1977~1987. | 제주교구 부교구장 교구장 직무대행 총대리1953. | 현대주교(현 하롤드)의 명에 의해 최초로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 도입▪선종일 : 1994년 7월 7일【선종사제】설요한 J. P. Russell 신부▪사목지 및 재임기간:1979~1983. | 서귀포본당, 서귀복자본당 주임1984~1987. | 성산포본당 주임(성산포성당 신축)1988~1996. | 신창본당 주임(신창성당 신축)▪선종일 : 1997년 7월 6일【평신도】최정숙 배아뜨릭스, 19. 3. | 신성여학교 1회 졸업1919. 3. |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졸업1919. 3.~11. | 3.1만세운동 참가(옥고)1943. |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1949. 8. | 신성여자중학교 교장 취임1954. 4. | 로마교황훈장 수훈1960. 7. | 제주도 중등 교육회장1963. 4. | 대한결핵협회 제주도지부장1964.~1968. |제주도 초대 교육감1967. 5. | 5.16 민족상 수상(교육부문)1993. |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 추서 백합 같으심이여님의 그윽한 향기 온누리에겨레 암흑기에 이 땅에 오시어샛별 동산에 닦으신 知와 德찬연한 독립의 횃불로 지키셨네초의 뜻대로 한평생을 사셨으며오랜 님의 보금자리 신성에 몸 바쳐이 땅 여성 교육의 터전을 이룩하시니이 동산 거쳐간 이들 하늘의 별처럼 크게 작게 그 빛을 발하매아 진정이 고장 온 여성의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질 구원의 영상이신져지금 그 아름다운 모습 대할 길 없으나님의 향훈 흰 백합같이 온 누리에 드넓게사랑의 빛 길이길이 퍼짐이여 1982년 5월 배아뜨릭스 先生 頌德碑(신성학원동문회 건립)【건립배경】하느님의 은총으로 신비롭게 형성된 이곳 제주의 용수리 해안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이 귀국 시에 표착하여 첫발을 디딘 한국 천주교회사의 현장이다. 박해로 신음하는 조국에 복음의 빛을 밝히고자 사제 서품 즉시 귀국길에 오른 김대건 신부 일행을 섭리의 손길로 폭풍우 속에서 구해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것이다.김대건 신부 일행은 이곳 해안에서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한 뒤, 타고 온 라파엘호가 수리되자마자 순교의 길로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박해의 칼날 아래서 천상의 영광을 안게 된다.이에 제주의 신앙 후손들은 이곳에 서려 있는 하느님의 섭리와 김대건 신부의 순교정신을 길이길이 새겨두기 위해 이 기념관을 세운다.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1길 108(한경면 용수리 4266)▪규모 | 부지 4,300평, 연건평 168평, 지상 2층의 문화 및 집회시설[라파엘호]【라파엘호(RAPHAEL)】이 배는 1845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일행이 제물포에서 상해로 가고 돌아올 때 탔던 무동력 목선(범선)으로, ‘길을 인도하는 대천사 성 라파엘’ 이름을 붙인 배이다.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인천성지,수원성지 페레올 주교를 비롯한 13명의 일행과 함께 상해에서 이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오다가 심한 폭풍을 만나 표류하던 끝에 이곳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였고, 다시 전라북도 금강 하류 화진포(나바위)에 도착하여 한국 본토에 상륙하였다.천주교 제주교구는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기록을 고증으로 하여 이 배를 복원하였고, 1998년 7월 31일, 김대건 신부 귀국 154년 만에 그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배의 길이 13.5m, 너비 4.8m, 깊이 2.1m, 중량 27.2톤2008년 9월 20일천주교 제주교구[은혜의 성모상=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상]【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상】이 성모상은 1830년에 프랑스 파리의 뤼뒤에 있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딸 사랑의 수녀원」에서 「카타리나 라부레」수녀에게 발현하여 「기적의 패」를 온 세상에 보급하도록 당부하신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다.김대건 신부는 라파엘호가 난파와 침몰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기적의 패에 새겨진 이 성모님의 상본을 들고 일행을 격려하면서 성모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기도하였다. 성모님께서는 조선해안의 비상경계망을 피하여 이곳에 표착하도록 안배해 주셨다. 봉헌 : 김진용 마티아(인천교구), 제작 :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수도회석재 :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 애석(쑥빛 무늬의 돌) 2008년 9월 20일천주교 제주교구[은혜의 성모상=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상=뤼드박 성모상][용수성지][용수성지에서 보는 차귀도]